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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작품 분석

by 행바나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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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책표지
살인자의 기억법

1. 기억과 정체성: 알츠하이머 환자의 시선으로 본 현실과 환상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 병수가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인간의 정체성이 얼마나 기억에 의존하는지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그는 과거 연쇄살인범이었지만 현재는 범죄와 거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병이 진행되면서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지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그의 기억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지 의심하게 되며, 이야기의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소설은 인간이 기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정의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병수는 기억이 흐려지면서 점점 자아를 상실하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는 스스로를 연쇄살인범으로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행위인지 헷갈려합니다. 이를 통해 김영하는 기억이 단순한 정보 저장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핵심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작품은 기억의 불완전성과 왜곡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서스펜스를 형성합니다. 병수가 경험하는 혼란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기억의 불확실성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삶을 구성하지만, 실제로 기억은 재구성되고 변형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기억이라는 요소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되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합니다.

2. 선과 악의 경계: 살인자이자 탐정인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

살인자의 기억법은 도덕적 혼란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주인공 병수는 과거 연쇄살인을 저질렀지만, 현재는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태주라는 또 다른 살인마가 등장하면서, 그는 다시금 폭력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는 태주가 연쇄살인범임을 직감하지만, 자신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면서 판단이 흐려집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병수가 선한 존재인지, 혹은 또 다른 악의 화신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소설은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회색지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병수는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며 정의를 실현하려 하지만, 독자는 그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태주를 막아야 한다고 믿지만, 그의 판단이 병으로 인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결국 독자는 병수의 행위가 정의로운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범죄인지 모호한 상태에서 작품을 읽어나가게 됩니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주인공이 살인자이면서도 탐정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입니다. 병수는 자신의 방식대로 정의를 실현하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여전히 범죄자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독자에게 도덕적 딜레마를 제공하며, 선과 악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김영하는 병수를 통해 인간 내면의 이중성을 탐색하며, 우리가 규정하는 도덕적 기준이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범죄 소설을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3. 서술 방식과 미스터리 구조: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효과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서술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병수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진실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듭니다. 병수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 기억이 왜곡되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이 사실인지, 혹은 망상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러한 기법은 독자에게 긴장감을 유발하며,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니라 독자가 직접 퍼즐을 맞춰야 하는 독특한 서사 구조를 형성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활용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독자는 처음에는 병수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건을 이해하려 하지만, 점점 그가 기억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모든 정보가 불확실해집니다. 병수가 회상하는 과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현재 일어나는 사건이 그의 착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작품의 몰입도가 높아집니다. 이처럼 서술 방식 자체가 작품의 미스터리를 강화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서술 기법은 작품이 끝난 후에도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독자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병수의 기억이 과연 진실이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됩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단순히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효과를 극대화한 이 작품은 김영하 특유의 문체와 결합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현대 문학에서 서사의 가능성을 넓힌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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